대한민국 역사의 모습들 - 농업 : 조선후기 농업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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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

우리나라 농업은 이렇게 쉴 사이 없이 발달해 왔으나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커다란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 첫째는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게 된 것이다. 이앙법이란 모판을 따로 만들어서 씨를 뿌려 모를 길러 가지고 적당히 모가 자란 다음에 이를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었다. 

 

고려 말기인 14세기에도 이러한 이앙법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이것이 널리 보급된 것은 17세기였던 것이다. 이앙법이 발달하게 되면 대부분의 논은 초여름까지도 비워두게 되므로 그 사이를 이용하여 보리농사를 할 수 있었다. 

 

즉 그 전 해에 보리를 심어서 초여름에 추수를 하고 그리고 다시 물로 옮겨 심어서 벼농사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모작은 같은 땅에서 한 번에 두 번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므로 식량을 크게 증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모작을 하게 되면 그 전보다도 더 수리문제가 중요해졌다. 왜 그런가 하면 이앙을 해야 할 적절한 시기에 물이 없으면 한해의 농사는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때에 저수지를 과거보다도 더 많이 만들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제언사라는 관청을 따로 만들어서 저수지를 만들고 수리하는 일들을 맡아보게 하였다. 또 농민들은 저수지를 공동으로 수리하는 목적으로 계를 모으기도 하였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18세기에는 전국에 저수지 수가 6천이나 되었다고 한다. 물은 논보다 깊은 곳에 있어야 이것을 논에 끌어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이 논보다 낮은 곳에 있는 경우도 많은 것이며 이런 경우에는 사람의 힘으로 이를 높은 곳으로 퍼 올려서 써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내게 되었다. 하나는 네모난 나무통 양쪽에 두 개의 끈을 달고 양편으로 갈라선 두 사람이 그 끈을 쥐고 물을 퍼 올리는 두레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배모양의 길쭉한 나무통을 만들어서 이것을 삼각추같이 얽어서 세워 논 나무에 끈으로 매달아 그 한쪽의 쥘 대를 손으로 쥐고 물을 퍼 올리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매우 힘이 드는 고된 노동인데 비해 그 성과는 그리 크지가 못하였다. 그래서 지식이 넓은 사람들 중에서는 중국에서 쓰는 수차를 이용하기를 권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때에도 그런 분이 있었으나 18세기 이후에 중국의 문명에 밝은 북학자들 중에 더욱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수차는 물레방아 바퀴와 같은 것을 발로 밟아 돌려서 밑의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었으므로 비교적 피로함이 없이 많은 물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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