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이 두 번 울리고 새앙쥐 걸음처럼 사뿐한 발소리가 들렸다. 오귀스타 할머니가 문에 달린 사슬을 벗기느라고 잠시 뜸을 들이고나서 문을 열었다. 자식 둘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뒤로 할머니는 옛날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아홉 평 남짓한 이 작은 집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그런 삶이 행복할 리가 없을텐데도 할머니의 상냥한 성품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는 게 우스광스럽다는 건 안다만 끌신을 신는게 좋겠다. 마룻바닥에 밀랍을 칠했거든."
조나탕은 할머니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할머니는 종종걸음으로 앞장서 걸으며, 그를 거실로 데리고 갔다. 거실의 많은 가구들에는 덮개를 씌워놓았다. 등받이가 있는 커다랗고 긴 의자의 가장자리에 앉으면서 조나탕은 그 플라스틱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네가 와줘서 정말 기쁘다. 내 말이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도 근간에 너를 한번 부르려고 했지."
"아 그러셨어요?"
"에드몽이 말이다. 너 주라고 하면서 나한테 맡긴 게 있단다. 편지 한 통인데, 그 애 말이, 자기가 죽거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편지를 조나탕 너한테 꼭 전해 주라는 거였어."
"편지를요?"
"그래, 편지를.... 가만 있자, 내가 그 편지를 어디다 두었더라. 생각이 안 나네. 잠깐만 기다려봐, 생각 좀 해보구.... 그 애가 나한테 편지를 주고, 내가 잘 보관하겠다고 말을 했지. 그런 다음에 내가 그 편지를 어떤 상자에 넣어 두었는데, 그 상자가 어떤 거였더라.... 아, 틀림없이 큰 벽장 양철 상자 중의 하나일 게야."
할머니는 끌신을 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세 발짝을 미끄러져 가서 멈추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손님 대접이 말이 아니구나! 마편초 차 좀 마시련?"
"좋지요."
할머니는 부엌 안으로 들어가서 그릇들을 이리저리 옮겼다.
"조나탕! 요즈음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 좀 해다오."
할머니가 부엌에서 소리쳤다.
"음.... 썩 좋은 편은 아니예요.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할머니는 하얀 새앙쥐가 머리만 살짝 내밀고 살펴보듯이 문께에잠시 머리만 내보이더니, 이내 기다랗고 파란 앞치마를 두른 모습에,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전신을 다시 드러냈다.
"회사에서 너를 내쫓았단 말이냐?"
"예."
"뭣 땜에?"
"할머니도 아시다시피, 자물쇠 용역 회사라는 데가 특이한 데잖아요. '자물쇠 SOS'라는 우리 회사는 파리 시내 어디드지 하루 24시간 아무 때고 부르면 달려가지요. 그런데, 제 동료 하나가 습격을 당한 뒤부터, 밤에 꺼림직한 동네에는 영 가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안가겠다고 버텼더니 그냥 잘라버리더군요."
"잘했다. 실업자 안 되자고 몸 상하느니 차라리 실업자 되고 몸 보전하는 게 백번 나은 일이다."
"게다가 주임하고도 사이가 안 좋았어요."
"그런데 그 뭐냐,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던 거는 어떻게 됐니? 내가 젊었을 적에는 그런 것을 누야쥬 공동체라고 부르곤 했었지"
할머니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는 뉴에이지를 '누아쥬'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피레네 산맥의 농장 일이 실패하고 나서 다 집어치웠어요. 뤼시도 이 사람 저 사람 밥 해먹이고 설거지하는 일에 진저리를 내더군요. 우리들 중에 기생충 같은 자들이 있었어요. 결국 서로 틀어지게 되었지요. 이젠 뤼시와 니콜라하고만 살아요. 그런데,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세요?"
"나? 죽지 못해 사는 거지. 한 순간 한 순간 목숨 이어가는 게 어느덧 내 일이 됐구나."
"할머니는 행운을 누리셨어요. 천년이 바뀌는 때를 사셨잖아요."
"그래? 한데 말이야, 새로운 천년을 맞았는데도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정말 놀랍지 뭐냐? 옛날에 내가 아주 어렸을 때만 해도 천년이 바뀌고 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하더니만, 네가 알다시피 정작 나아진 게 없지 않니? 늙은이들은 여전히 고독 속에서 살고, 실업자들이며 매연 내뿜는 자동차들로 여전히 말이야. 사람들 생각조차 달라진 게 없어. 봐라, 재작년엔 로큰롤, 작년엔 초현실주의를 재발견했다고 야단들을 떨고, 또 요즈음 신문에선 벌써부터 올 여름에 복고풍의 짧은 치마가 유행할 거라고 떠들어대고 있잖니.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면 지난 세기 초의 낡은 사상들도 머지않아 다시 나오게 될거야. 공산주의라든가 정신 분석, 상대성 원리 따위 말이다."
조나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몇 가지 달라진 게 있긴 있었어요.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길어졌고요, 이혼율, 대기 오염의 수준은 높아지고, 지하철 노선도 연장되었잖아요."
"다 쓸데없는 일이지. 난 말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개인용 비행기를 갖고 발코니에서 비행기를 띄울 수 있으리라고 믿었단다.... 내가 젊었을 땐 사람들이 핵 전쟁을 두려워했지. 정말이지 엄청나게 무서워했단다. 이제 100살을 눈앞에 두고 보니, 핵탄이 빚어낸 거대한 버섯구름의 불길 속에서 이 지구와 함께 죽는다면 그래도 그럴싸할 것 같애. 그렇게 죽는 대신에 나는 이제 썩은 감자처럼 죽어야할 판이지 뭐냐. 썩은 감자 따위에 누가 신경을 쓰겠냐. 모두들 나몰라라 하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날씨가 너무 더워. 갈수록 더워져. 나 젊을 적에는 이렇게 덥지 않았어. 겨울은 겨울다웠고 여름은 여름다웠지. 어떻게 된게 이제는 삼복 더위가 3월부터 시작이야."
할머니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서, 범상치 않은 노련한 솜씨로 진짜 감칠맛 나는 마편초 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비방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바삐 움직였다. 성냥 긋는 소리, 옛날식 가스 레인지의 분사구에서 가스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나서, 할머니는 훨씬 더 느긋해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네가 나를 찾아온 데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텐데. 요즘 세상에 이렇게 늙은이들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말이지."
"어째 할머니 말씀이 꼬인 것 같은데요."
"꼬는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다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 자, 내숭은 그만 떨고 무슨 일로 왔는지 얘기나 해봐라."
"'그분'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집을 물려주셨는데 저는 그분을 알고 있지도 못하잖아요."
"에드몽 말이냐? 에드몽에 대한 기억이 없단 말이지? 너는 잘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다만, 네가 어렸을 때 그 애는 너를 거꾸로 들고 비행기를 곧잘 태웠지 한번은 말이다. 이런 일도 있었...."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건 저도 생각이 나요. 그런데 그 일말고는 전혀 아는게 없어요."
할머니는 의자 덮개가 너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커다란 안락 의자에 앉았다.
"에드몽은 뭐랄까. 인물이지, 아니 인물이었지. 아주 어렸을 때 벌써 네 삼촌은 많은 골칫거리를 나에게 안겨주곤 했지. 그 애 엄마노릇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어. 예를 들자면 이런 거지. 장난감이란 장난감은 분해했다가 재조립한답시고 죄다 박살을 내놓았어. 다시 조립해내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 장난감만 박살을 냈으면 다행이게! 뭐든지 다 분해를 하는 거야. 시계, 전축, 전기 칫솔 할 것 없이. 한번은 냉장고까지 분해한 적이 있었지."
할머니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실에 걸린 고물 괘종 시계가 을씨년스럽게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저 시계도 어린 애드몽 때문에 온갖 쓴맛 신맛을 다 보았으리라.
"게다가 에드몽에겐 이상한 버릇이 또 하나 있었지. 은신처를 만드는 버릇이었어. 그 애는 다락방에다 이불이며 우산으로 저만의 공간을 만들기도 했고, 제 방에다 의자와 모피 외투로 만든 적도 있단다. 그 애는 그렇게 숨을 곳을 만들어 거기에 제가 모은 보물들을쌓아놓고는 그 안에 틀어박혀 있기를 좋아했지. 그 안을 한번 들여다보았더니, 방석들이며 그 애가 기계에서 빼낸 온갖 잡동사니들로가득차 있더구나. 어떻게 보면 그곳이 꽤 아늑해 보이기도 했어."
"어릴 적에는 누구나 다 그렇지요, 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 삼촌의 경우는 정도가 심했지. 그애는 더 이상 침대에서 자지를 않았어. 한사코 제가 만든 둥지에서만 자겠다는 거야. 이따금 며칠 낮을 꼬박 거기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있기도 했어. 마치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말이야. 오죽하면 에드몽이 전생에 틀림없이 다람쥐였을 거라는 소리를 네 어미가 다 했겠니."
조나탕은 할머니가 이야기에 신바람을 낼 수 있게 하려고 미소를지어 보였다.
"하루는 에드몽이 거실 탁자 다리 사이에 제 오두막을 지으려고했지. 그게 꽃병의 물을 넘치게 한 마지막 물방울처럼 되고 말았어. 네 할아버지는 별로 화내는 일이 없는 분인데. 그날은 불같이 화를 내셨단다. 그 양반은 에드몽의 볼기를 때리고 둥지를 모두 부숴버리더니 에드몽이 침대에서만 자도록 잡도리를 하셨지."
그 말 끝에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부터 그 애와 우리 사이에 완전히 금이 갔단다. 어미와 자식을 잇고 있던 탯줄이 끊어진 거나 다름없었어. 우리는 더 이상 에드몽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지.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시련을 그 애가 겪었어야 했어. 세상이 언제까지고 제 맘대로 되는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야 했던 거지. 그러지 못한 것이 나중에 그 애가 커서도 문제가 되었어. 에드몽은 학교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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