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은 지형과 기후에서 우리 만족의 형성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북방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동해 왔을 것인데, 이들이 이동해 온 경로가 곧 문화의 유입로이며 교통로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냥 등으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였으나, 화살촉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흑요석과 같은 것은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되므로 그것을 물물교환을 통해 구하였다. 당시에 이미 씨족 사이의 왕래와 물건의 교역을 위한 교통로가 생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통수단이 별달리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사람이 직접 걸어다니며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청동기 문화가 수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배와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바위에 새겨졌을 암각화에 배를 타고 고래잡이를 하는 장면이 들어 있음에서도 이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때부터 말이 교통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청동으로 만든 말 모양의 드리개(패식) 같은 당시의 유물이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또한 부여, 고구려, 동예 등의 말이 중국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정도로 유명하였고, 남쪽의 변한, 진한에서도 널리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마차가 등장하였다. 말의 입에 물리는 철로 만든 재갈뿐만 아니라 멍에 등 수레를 말에 연결하는 거여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물론 말과 마차를 타고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일부 지배층만의 것이었다.
이들 지배층은 부여에서는 가라고 불리었는데, 이들이 주관한 사출도라는, 왕경을 중심으로 한 동, 서, 남, 북 사방에 짜여진 행정구역이 있었음은 당시에 중앙으로 집중되는 교통망을 갖추어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인 지방 통치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문자 그대로 영토를 널리 개척하여 유명한데, 그의 능에 세워진 비문에 일생 동안 넓힌 것이 성이 64, 촌이 1400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에 성과 촌을 중심으로 하여 너른 지역을 중앙에서 통치할 수 있도록 도로망은 물론이고 지배체제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런 상황은 신라, 백제의 경우도 거의 같았다. 신라는 이미 소지와 9년에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공공도로이었을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서 왕경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리의 왕래에 편의를 제공해 주는 우역이 설치되었을 뿐아니라, 이것을 거점으로 교통망이 국가에서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통망을 토대로 삼국이 모두 중앙과 지방을 행정 구획으로 구분하였다. 교통의 중심지인 왕경은 신라의 경우 줄곧 금에 두었으나 고구려는 압록강가의 국내성에서 대동강가의 평양성으로, 백제는 한강가의 위례성에서 금강을 거쳐 사비성으로 각각 옮겼는데, 이 왕경을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모두 5부로, 신라에서는 6부로 나누었다. 그리고 지방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 서, 남, 북 등의 방위를 가리키는 명칭을 취하여 각각 5부와 5방, 신라가 상, 하 등의 여러 주를 두어 통치조직을 갖출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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