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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삼국시대 이후가 되면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들이 자신의 권위를 더욱 높일 필요가 있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노력도 커졌다. 자연히 건축, 공예, 미술품 따위의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이에 따라 전문적인 장인들이 여기에 관여하게 되었다. 신라의 옛무덤에서 나오고 있는 여러 부장품들 가운데에는 금으로 만든 관, 띠, 귀고리, 가락지, 팔찌라든가 유리, 구슬 같은 지극히 아름다운 세공품들이 있었는데 그 구석구석에 수공업자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이다. 불국사 석굴암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석탑이나 불상 그리고 범종들도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생활과 관련있는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가령 가죽으로 물품을 만들거나 비단으로 옷감을 짓거나 하는 것들이 그러한 예이다.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순금제품 같은 ..
돌이나 나무, 광석과 같은 자연물을 사람의 힘으로 본래 모습을 변경시켜 쓸모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공업이다. 오늘날은 기계를 부려서 생산을 하지만 과거에는 손이나 간단한 기구를 부려서 생산을 하지만 과거에는 손이나 간단한 기구를 써서 물품을 생산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수공업이라 불렀다. 수공업은 주문을 받아서 많은 수의 물품을 만들어 내는데 그 일에 매달려서 밥벌이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장이라고 일컬어졌다. 이러한 것을 내용으로 하는 수공업은 나라를 이룬 뒤에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 나라가 생겨나기는 3천년 전쯤부터인데 이 때에 처음으로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몇 백년 뒤에 보다 단단한 철을 사용하게 되었다. 청동이나 철로 칼이나 창 따위의 물건도 만..
19세기말에 가서 우리나라가 서양의 여러 나라와 교섭을 가지게 되면서 농업도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배워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의 침략에 의하여 그 식민지가 되게 되었다. 이때에 일본은 자기 나라를 공업 국가고 발전시키고 그 대신 자기 나라에서 모자라는 식량을 우리나라에서 가져가려고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우리나라 농업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저수지도 만들고 기술도 개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나라를 위한 것이지 우리나라를 의한 것은 아니었다. 식량은 약간 증산이 되기는 하였으나 증산된 것의 몇 배나 되는 쌀을 우리나라로부터 가져갔던 것이다.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가져갔다면 그들의 야욕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을 먹이기 위..
우리나라 농업은 이렇게 쉴 사이 없이 발달해 왔으나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커다란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 첫째는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게 된 것이다. 이앙법이란 모판을 따로 만들어서 씨를 뿌려 모를 길러 가지고 적당히 모가 자란 다음에 이를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었다. 고려 말기인 14세기에도 이러한 이앙법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이것이 널리 보급된 것은 17세기였던 것이다. 이앙법이 발달하게 되면 대부분의 논은 초여름까지도 비워두게 되므로 그 사이를 이용하여 보리농사를 할 수 있었다. 즉 그 전 해에 보리를 심어서 초여름에 추수를 하고 그리고 다시 물로 옮겨 심어서 벼농사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모작은 같은 땅에서 한 번에 두 번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므로 식량을 크게 증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
앞에서 말한 것으로 대개 짐작을 하였을 것이지만 농사에 중요한 것은 봄에 논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그 곡식이 자랄 수 있도록 물을 공급하고 그리고 가을에 곡식을 거둬들이는 일이다. 논밭을 갈자니 쟁기가 필요하고 물을 대자니 저수지가 필요하고 추수를 하자니 낫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가장 일찍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땅은 갈아서 일구어만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논바닥을 고르게 만드는 써레라든가 흙을 부수어서 부드럽게 만드는 미리깨 같은 것이 보조 농구로 쓰여졌다. 또 논밭에서 베어 온 곡식의 낟알을 뜯어내기 위해 도리깨나 그네 등이 필요했고 낟알의 껍질을 벗기기 위하여 절구나 연자매 혹은 물레방아가 필요하였다. 연자매는 소나 말의 힘으로 곡식을 찧는 것이고 물레..
논농사를 하는 데는 물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빗물이 논농사에 넉넉할 만큼 항상 충분히 내리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퍽 오랜 옛날부터 저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같은 저수지라도 흐르는 시냇물을 막아서 물을 고이게 하기도 하고 혹은 평지를 깊게 파헤쳐서 땅밑으로부터 솟아나는 물을 고이게 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삼국시대에 들어서면 나라에서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이러한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다.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있는 전라도 김제의 벽골제는 그 대표적인 것인데 김제라는 이름도 이 저수지가 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대개 제라는 글자가 붙은 지방에는 그러한 저수지가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